노근리 다리, 최상훈찰스 핸리 외 1, 잉걸, 2003

 

o 도서선정 이유 : 이 책은 1999AP통신에 의해서 전세계에 최초로 보도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실상을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3명의 AP기자들이 한국인 피해자 가족을 포함해서 퇴역 미군 등과 500여 차례의 인터뷰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기록물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 여러분께 이 책에서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 노근리에서 일어난 미군의 피난민에 대한 공격과 전쟁의 참혹한 피해상을 전달하여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념적 갈등의 근원을 이해하고 극복할 방안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글 작성 : 바로코리아(오정삼)

 

 <목차>

 1. 예정된 비극,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2. 노근리 사건 보도 그 이후, 우리는 어디에 와있는가?

 3. 한국전쟁과 분단에 의한 사회적 갈등의 진정한 종식을 향하여

 

 

1. 예정된 비극,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밀라이 양민 학살사건[각주:1]과 더불어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군에 의해서 벌어진 전투기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인하여 300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사망한 대표적인 학살사건이다.

1999AP통신에 의해서 최초로 이 사건이 보도된 이후 미국 뉴욕타임즈의 취재보도 뿐만 아니라 영국의 BBC방송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영하였으며 비로소 전세계에 그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AP기자들이 한국인 피해자 및 가족, 그리고 퇴역미군을 포함한 150명에 이르는 생생한 증언과 통해서 드러난 사실은 노근리 사건의 참혹상이 단순한 작전상의 사고가 아닌 미군의 정책적인 피난민에 대한 공격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AP기자들의 집요한 취재에 의해서 수집한 비밀해제문서 가운데서 발굴한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 수십 건의 문서들에 의하면 미군은 노근리의 피난민들에 대해서 북한군의 침투를 우려하여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각주:2]

여기서 잠시 필자는 노근리 사건의 일자별 개요에 대해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노근리 사건 일지>[각주:3]

1950. 7. 23. : 미군의 소개령으로 주곡리 주민들 임계리로 피난

1950. 7. 25 : 500700명 주민들 미국의 인솔 하에 임계리에서 황간 방향으로 이동

1950. 7. 26. : 미군의 지시에 따른 피난행렬이 거의 노근리에 다다랐을 때 미군 전투기가 폭격과 기총사격 가하기 시작하고 지상군도 총격을 가하여 100여명의 피난민이 사망

1950. 7. 2629. :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미군의 지시로 노근리 마을 앞 쌍굴다리로 들어가고, 3일에 걸쳐서 미군은 철길 굴다리 앞뒤에서 총포격을 가함. 이 때 죽은 사람이 최대 300명에 달함[각주:4]

 

위의 사건일지에서 보여지는 중요한 대목은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723일부터 729일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AP통신이 밝혀낸 비밀해제된 문서들에 의하면 흰옷을 입은 사람들[각주:5]을 기총 소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작전 중이던 미 항공모함 밸리 포지(Valley Forge) 호의 함재기 전투요약보고서 가운데는 노근리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1950. 7. 25.) 해군 함재기들이 “8명에서 1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병력으로 간주, 공격하라는 육근 측의 통고[각주:6]에 따라 흰옷을 입은 무리에게 기총공격을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노근리 사건이 결코 작전상의 실수이거나 우발적인 비극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수행 시 민간인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의 하나로부터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 노근리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전쟁범죄는 비단 노근리라는 한정된 지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한국전에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들이 1970대와 1980년대에 걸쳐서 비밀이 해제 되었으므로 19999월의 AP통신의 첫 보도 이후에 많은 해제된 비밀문서들이 공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거의 전 지역의 전선에서 양민에 대한 발포와 공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미군의 양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발포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시사하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해제된 비밀문서의 몇 가지 사례를 나열해보고자 한다.

 

1.1. 낙동강 전선 제1기병사단 야포사령부 통신일지(1950. 8. 29.)[각주:7]

사단장 게이 장군(암호명 : 세이버 6 Saber 6)이 모든 피난민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1.2. 미 제8군 사령부가 전선 전역에 내린 사살명령서(1950. 12. 3.)[각주:8]

"귀관의 지역에서 모든 민간인 움직임을 중지시킬 완전한 권한을 귀관에게 부여한다. 이들에게 폭격을 포함한 공격 권한도 귀관에게 있다.“

 

1.3. 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제2대대일지(1951. 1. 3.)[각주:9]

8연대 예하 모든 부대에게 지시한다. 인간이던 짐승이던 어떤 피난민 무리도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라.”

 

이상의 몇 가지 작전명령 사례만 보더라도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노근리 학살 사건을 일으킨 영동지방 뿐만 아니라 한강, 낙동강 전선을 포함한 거의 전 전선에서 양민에 대한 적대적 공격을 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안고 있는 예정된 비극이었다는 것이며,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쓰러져간 죽음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비극적 역사에 대한 올바른 해결의 과제를 남겨놓았다.

 

2. 노근리 사건 보도 그 이후, 우리는 어디에 와있는가?

 

노근리 사건의 AP통신의 최초 보도 이후 이 사건이 세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면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정책의 동시 피해자이기도 한 퇴역미군들과 피해자 유가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서 진상이 낱낱이 파헤쳐지기까지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은 1960년에 처음으로 미국정부를 상대로 책임규명과 손해배상을 위한 청원을 한 이래 2000년 대까지 한미 양국정부에 꾸준히 진정을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2001112일에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공동으로 한미공동발표문을 발표하고 “50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되었으며, 전상후유증, 연령, 대중매체 등 여러 요소들에 의해 한미 증언자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각주:10]고 규정하고, 미국은 빌 클린턴 정부의 깊은 유감을 표명하는 선에서 책임규명과 피해자보상을 원하는 유가족들의 청원을 실제적으로 외면하였다. 또한 한국정부는 2004노근리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각주:11]을 제정하고 사건 희생자에 대한 심사를 실시하여 2005년에 비로소 상해, 사망, 실종 등 희생자 226명과 유족 2,240명을 확정[각주:12]하여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및 유가족들의 명예회복을 꾀하였으나, 역시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서 노근리 사건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3. 한국전쟁과 분단에 의한 사회적 갈등의 진정한 종식을 향하여

 

최근 일본의 아베정권은 우경화 행보를 강행하며 인근 주변국 뿐만 아니라 동북아 권역 전체에 걸쳐서 긴장과 국가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관되게 모르쇠정책을 펴나가며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위안부 피해국가들 모두로부터 공분을 사고 있다. 민족이나 국가 혹은 사회 내부의 갈등과 반목은 잘못을 저지른 측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상호간의 관계 회복을 요구할 때 쉽사리 아물어지지 못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피해 당사자가 입은 환부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아픔을 치유하는 데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내부의 갈등과 이념적 대립의 시원을 찾는 데 있어서 가까이 한국전쟁의 상흔을 외면할 수 없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어느덧 한국전쟁 이후 60 여년의 세월이 흘러왔건만 전쟁의 상처는 결코 빛바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살아있는 경험의 한 부분일 뿐이다. 특히 60여 년 전 좌우이념 대립의 정세 하에서 내전을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자칫 60여 년의 세월의 흐름이 우리 부모 세대가 경험한 가장 아픈 기억을 과거로 돌릴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당장 필자의 경우만 보더라도 필자가 대학시절 겪었던 광주민주항쟁‘6월 민주화 항쟁들은 모두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이 우리 사회가 경험한 큰 아픔 가운데는 세월호 사건이 있다. 그런데 1년도 안된 이 아픔조차도 어떤 이들에게는 빛바랜 사진 속의 경험으로 존재할 지도 모르지만, 그 희생자 유족 당사자들에게는 영원히 현재형의 깊은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세월호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정부의 총체적 부실 대처에 대해서 문제를 바로 잡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패망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온 민족의 해방 앞에서 좌우의 이념적 갈등을 조정할 여유도 없이 한국 사회는 강대국들 간의 세력싸움의 한판의 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우리 민족은 민족의 운명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 양대 강국의 체스판의 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으며, 그 순간 미소 강대국 어느 누구도 우리 민중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전쟁 내내 우리 민중들이 반목하고 상처 입히고, 죽어간 이유는 좌우 대립이라는 이념적 페르소나를 뒤집어쓴 비이성적 냉전의 거대한 야수의 손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 그리고 휴전 이후의 남북 대립의 상황에서 이들 냉전의 거대한 야수들은 자신들이 뿌려 놓은 갈등의 씨앗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넝쿨의 타래로 자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물러앉아 버렸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뿌리지 않은 갈등의 넝쿨을 과감히 내던져버리고 우리 사회 내부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불신과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를 입힌 당사자들의 진정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 오늘 필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인 3년 여 간의 한국전쟁 중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야만적 범죄 행위에 대한 미국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와 피해보상도 또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보다 성숙한 자세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하는 잔인한 전쟁터가 아니다. 60여 년 전 한국전쟁의 상처가 우리 민족 가슴 속에 아프게 새겨놓은 살생의 트라우마를 내버려야 한다.

 

사회는 공존의 숲이다. ‘공존의 숲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식생이 뿌리내려야 한다. 보다 많은 햇빛과 바람과 물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이념적 스펙트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존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용인의 시대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1] 최상훈찰스 핸리 외 1, 노근리 다리, 잉걸, 2003

[2] 정구도 등, 한국전쟁기 인권침해 및 역사인식의 문제, 두남, 2008

[3] 노근리 평화공원(www.nogunri.net)

[4] 노근리 사건개요”,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1_01.html

[5] “2001년 한미 노근리사건 공동발표문”,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1_05_t01_02.html

[6]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1_09.html

[7] “노근리사건 희생자 신고현황”,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4_01.html

 

 

 

  1. 밀라이 양민 학살사건은 1968년 베트남의 쾅나이 지역, 밀라이 마을에서 미군에 의해서 벌어진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한 양민 500여명에 대한 학살사건이다. [본문으로]
  2. “제5공군 로저스 대령 메모”, 『노근리 다리』, 잉걸, p.360, 2003 노근리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작성된 당시 대구에 주둔한 미 제5공군 전방지휘본부의 작전참모부장 터너 로저스(Turner C. Rogers) 대령이 사령관 대리 팀버레이크(Edward L. Timberlake) 준장에게 보낸 메모에 의하면 로저스 대령은 “육군은 미군진지로 접근하는 모든 피난민들을 우리 공군이 기총공격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3. “노근리 사건개요”, 노근리평화공원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1_01.html [본문으로]
  4. Ibid., pp.20-21 [본문으로]
  5. "미 제5공군 제35전폭기대대 피난민 공격 보고“, Ibid., p.358 [본문으로]
  6. “밸리 포지 출격 전투요약보고서”, Ibid., p.361 [본문으로]
  7. Ibid., p.365 [본문으로]
  8. Ibid., p.369 [본문으로]
  9. Ibid., p.370 [본문으로]
  10. “2001년 한․미 노근리사건 공동발표문”,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1_05_t01_02.html [본문으로]
  11.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1_09.html [본문으로]
  12. “노근리사건 희생자 신고현황”, 노근리평화공원, 2011 http://www.nogunri.net/html/kr/nogunri/nogunri_04_01.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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