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입력 2013.05.08 19:30:01, 수정 2013.05.09 15:22:42

북한학과·벤처학과·융합기술학과·창조경영학과…
정권코드·유행따라 개설하고…"학생진로 불투명" 일방적 폐지
교육부선 “대학자율사항” 뒷짐

 

명지대 4학년 이명훈(가명·25)씨는 4년여 전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고교시절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씨는 북한문제 전문가가 되고자 2007년 북한학과에 입학했다. 1∼2학년 때만 해도 금강산 관광과 남북 경제교류가 활발해 졸업 후 전망도 밝았다. 그러나 2008년 말 대학은 돌연 북한학과 폐지를 통보했다. 당시 이명박정부가 들어서고,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대북관계가 얼어붙었다. 대학은 전과율이 높고 취업률이 낮다는 점을 폐지 이유로 내세웠다.

명지대 북한학과는 2009학년도 신입생 모집을 끝으로 정치외교과에 통폐합됐다. 이씨는 8일 전화통화에서 “학교 스스로 학문을 가르치기보다는 정권 눈치보기에 급급하다는 걸 자인한 셈”이라고 비난했다.

정권의 ‘입맛’과 유행에 맞춘 대학의 ‘묻지마’ 학과(부) 개설로 학생들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인재육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신설했다가 ‘약발’이 떨어지면 폐지하는 반짝 학과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육부의 정량적 대학 평가로 대학의 학과 개설·통폐합이 급증하고 있지만 당국은 “정원 내 학과 개설은 대학의 자유”라며 손을 놓고 있다.

지난 4일 창조경영학과 신설 검토를 밝힌 서울대는 “정권 입맛 맞추기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연덕원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창조경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부의 구체적인 그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학이 비슷한 이름의 학과를 신설하겠다고 밝힌 것은 한심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충분한 사전검토 없이 시류를 타고 등장했다 명멸한 학과가 적지 않다. 북한학과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 탈냉전 분위기를 타고 동국대와 명지대, 고려대, 조선대 등 6개 대학이 북한학과를 신설했다. 그러나 조선대는 ‘학문의 정체성이 불분명해 학생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1년 만에 폐지했고, 다른 3개 대학도 10∼15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현재 북한학과가 남아 있는 곳은 동국대와 고려대뿐인데, 이마저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폐지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을 전후해서는 신지식인을 강조한 김대중정부의 영향으로 학과명에 ‘벤처’를 넣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경희대와 대전대 등이 벤처와 경영을 결합해 학과를 신설하거나 명칭을 변경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또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UIC)은 유행하는 키워드(주제어)를 조합해 버릇처럼 학과를 신설하고 있다. UIC는 2008학년도 신입생 모집 당시 이공계열에 융합정보기술(IIT)학과를 명시해 놨지만 운영상의 이유로 없던 일로 했다. UIC 한 학생은 “IT를 배우고 싶어 UIC로 진학했는데 입학하고 나서야 IIT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며 “학생들 반발이 심해지자 학교 측은 이공계 학생에 한해 본교 이공계로 소속을 바꿔 주는 것으로 무마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UIC에 개설된 테크노아트와 아시아학부도 1년 만에 폐지론에 휩싸였다가 얼마 전 가까스로 위기를 면했다. UIC의 학기당 등록금은 700만원 전후이다. 이 학생은 “학교가 그럴듯한 학과를 만들어 등록금 장사를 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의료·보건, 교원 등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 정원 내 학과 개설·폐지는 대학 자율”이라며 “일부 학생피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교육부에서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문제”라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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