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등록 : 2013.03.29 20:04 수정 : 2013.03.30 14:40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4>입시제도와 평준화 정책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입장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박정희가 단행한 평준화 정책에 대해서만큼은 진보와 보수와 입장이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평준화 정책을 유지하려 하는 반면, 박정희를 숭배하는 자들은 기를 쓰고 평준화를 깨버리려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몇년 전 이야기인지 모른다. 과학고와 외국어고 등 특목고 출신들이 상위권 대학 입시를 휩쓸고 있는 현실에서 지금 지켜야 할 평준화가 남아 있느냐는 탄식조차 어렵지 않게 들어볼 수 있다.

 

 

과외 시달린 국민학생들의 집단 가출사건

1945년 해방 당시 문맹률은 근 80퍼센트였지만, 놀라운 교육열 덕에 해방 30년이 된 1975년에는 한국인 전체의 평균 학력이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 수준에 이르렀다. 박정희가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 무시험 진학을 단행한 데 이어 1974학년도부터 고등학교도 무시험 진학을 실시한 것은 한국 사회의 교육 팽창을 반영한 것이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한국 사회의 교육열은 분단과 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한국이 빠른 시간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의무교육의 실시로 1950년대 후반 거의 모든 취학연령의 어린이들이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국민학생의 수는 크게 늘어났고, 자연히 중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도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중학교 수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수용하기 어려웠고, 자연히 중학교 입시는 갈수록 치열해졌다. 1960년대의 중학교 입시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1965학년도 입학시험 당시의 무즙파동을 들 수 있다. 1964년 12월7일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자연과목 18번 문제는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공동출제위원회의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지만, 다수의 학생들은 무즙을 선택했다. 이 문제 하나로 당락이 갈린 학생들의 부모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열성 부모들은 아예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엿 먹어라” 시위를 벌였다. 법원은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어 모두 38명의 학생이 명문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틈을 타 명문 중학교에 자녀들을 밀어 넣어 21명이 덤으로 부정입학을 한 것이다.

부정입학 관련자 중에는 청와대 정무비서관 민충식과 공보비서관 박상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는 서둘러 이들을 해임했지만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박정희가 직접 개입하여 문교부 차관, 문교부 보통교육국장, 서울시교육감 등의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이 사건을 두고 <동아일보>는 “무우즙 사건의 여파는 대단하다. 학교장의 목을 날리고 청와대 비서관의 목을 날리고 권력지도를 재작성케 하고”라고 꼬집었다. 1967년에는 과외에 시달린 국민학생 4명이 1주일이 넘도록 집단 가출하여 부모들이 “이젠 과외 안 시킨다. 빨리 집으로 와 다오”라고 호소하는 신문기사가 <조선일보> 사회면 톱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정희가 명문고 중심으로 한
학연체제 깰 수 있었던 것은
그 학연 바깥에 있었기 때문
명문고 기득권 박탈하는 악역
경기고 출신 민관식에 시켰으니
그의 용인술은 참으로 냉혹했다

평준화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명문고 선배는 뺑뺑이 후배를
후배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화여고는 22명을 자퇴시켰고,
열반 학생들은 이리로 취급됐다

1968년 7월15일 문교부 장관 권오병은 국민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추첨으로 입학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문교부는 중학교의 일류병을 없애기 위해 서울의 경기·서울·경복중과 경기여중·이화여중 등 5개의 명문 중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 국민 대다수는 이 조치를 “20년 동안 끌어온 입시지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학교군 추첨제의 혁명”이라고 환영했다. 언론은 국민학교엔 환성이 터지고 어린이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고 보도했다. 극장과 만화방에는 아이들이 넘쳐났다. 명문 중학교의 폐쇄, 특히 사립인 이화여중의 폐쇄는 상당히 폭압적인 조치였지만 고등학교가 존속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반발은 크지 않았다. 반발은 엉뚱한 데서 나왔다. 서울시교위는 1969학년도에 5개 중학을 폐쇄하고 용산·경동·사대부중과 창덕여중·수도여중은 1969학년도에 전체 학급의 절반을, 1970학년도에 나머지 절반을 없애도록 계획했다. 그런데 시교위가 용산·사대부중·창덕여중 등 3개 중학을 명칭을 바꿔 존속시키려 하자 용산고 학생 1천여명이 “다른 일류 중학은 다 폐쇄하는데 왜 우리만 남겨두느냐. 계속 존속하면 학생들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 등을 들어 격렬한 반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채택은 중등교육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중학교 입시 폐지를 발표한 권오병에 대해 당시 한 신문은 “폭탄적인 중학입시제 폐지를 발표, 600만 국민교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며 “이 정도라면 어린이 왕국에서 왕좌를 누릴 만하다”고까지 보도했다. 권오병은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의무교육 9년 연장을 위한 첫 조치”라면서 “수익자에게 과중한 부담 없이 정부의 중등교육비로 3년 안에 중학교의 평준화를 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일선에서 교육을 책임지고 있던 서울시교육감 최복현의 설명은 달랐다. 그는 중학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라면서 “중학교 시설비와 증설비는 수익자 부담원칙에 따라 학부형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내 국민학교 졸업생이 매년 3만명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은 해마다 중학교를 500학급씩 증설할 것을 요구하는데 국가의 재정형편이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중학교의 공납금은 사립과 공립을 같은 수준으로 맞추면서 크게 올랐는데 공립의 인상 폭은 65퍼센트나 되었다.

‘농민의 아들’다운 가장 급진적 사회개혁

1969년 2월5일 영하 15도의 혹한에 어린이들은 자기 손으로 뺑뺑이를 돌려 자신이 3년간 다닐 중학교를 추첨했다. 아이들이 직접 추첨하는 것에 대해서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높았다. 당국은 ‘삼류 학교’를 뽑은 학생이 진학을 포기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추첨한 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어린이는 다음해 추첨권을 갖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사설 학원에 대해서는 고입 검정고시반의 학생 모집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여 학생들의 이탈을 방지했다. 당국은 ‘삼류 학교’를 뽑은 우수학생의 진학 포기를 걱정했지만, 현실에서는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사립명문 배재중에서는 학력이 부진한 학생 29명을 “도저히 중학생의 학력을 인정할 수 없는 ‘저능아’들이기 때문에 교칙에 따라 퇴학”시킨다며 무더기로 쫓아내 말썽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정한 평준화가 이루어지려면 학생과 교사와 시설이 모두 평준화되어야 하지만, 학생은 확실히 평준화되었지만 교사와 시설의 평준화-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확연해지기 이전까지-는 한참 뒤떨어졌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이 실시되자 국민학생들은 살판났지만 그 전까지는 경기중에 입학하면 큰 문제가 없는 한 경기고에 진학하는 식의 동계진학 방식으로 고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학교 입시를 없애자 풍선효과처럼 고등학교 입시가 치열해져갔다.

유신쿠데타 직후의 추상같은 분위기에서 박정희 정권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한 평준화를 단행했다. 1974학년도부터 서울과 부산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를 통해 학군별로 총인원을 선발하여 추첨 배정하는 방식으로 1975년도에는 대구, 인천, 광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문교부 장관 민관식은 고교입시의 병폐로 “학생의 신체적 발달 저해, 이기적이고 비협동적인 성격 형성, 학교격차 조성, 사교육비, 학교교육 불신, 출신 학교 위주의 인간평가” 등을 꼽았다. 박정희는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더 시키고 중학교의 어린 학생에게는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심신을 고루 발달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는 한국 사회에 일류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연·학벌사회가 강력히 자리를 잡고 있던 때였다. 그 정점에는 경기고-서울대의 특권적 교육재화를 보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케이에스(KS) 마크’가 있었다. 꼭 경기고만이 아니었다. 서울에는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명문고가 있었고, 전국 각 지역에도 지역의 명칭을 딴 명문고들이 강력한 학연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명문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학연체제의 바깥에 있었다. 박정희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차지철 등 군 출신 실력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관료 중에도 명문고 출신이 아닌 자가 훨씬 더 많았다. 예컨대 박정희 시절 최고의 관운을 자랑한 신직수는 전주사범에 이름도 생소한 한국대학 출신이고 남덕우는 중학교 독학에 국민대학을 나왔다. 김정렴은 강경상고를 졸업했고, 장기영은 선린상고가 최종 학력이었다.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육사 출신과 서울법대 출신들이 세상을 쥐고 흔들며 ‘육법당’의 전성시대를 구가한 것은 박정희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박정희의 용인술은 참 냉혹했다. 박정희는 경기고 등 명문 고등학교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악역을 경기고 출신인 민관식에게 맡겼다. 훗날 민관식은 자신이 경기고 출신이 아니었다면 평준화라는 개혁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중학교 무시험과 고교평준화와 같은 과감한 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수근댔다. 박지만은 1958년생으로 중학교 ‘뺑뺑이’로는 3기, 고등학교 ‘뺑뺑이’로는 1기에 해당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58년 개띠’란 말도 있듯이 이 세대는 바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열은 대단했고, 이제 고등교육은 일제시대와 같이 소수 엘리트의 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등보통교육’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들에게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한국법조인대관>의 경기고, 그리고 대원외고

평준화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기존의 명문 고등학교는 명문 고등학교대로, 세칭 삼류 학교는 삼류 학교대로 선배와 후배 사이에 서먹서먹한 관계가 계승되었다. 명문고의 재학생 선배나 동문들, 심지어는 몇몇 선생님들조차 운 좋게 뺑뺑이를 돌려 들어온 신입생들을 제대로 된 후배나 제자로 대접하지 않았다. 이른바 삼류 학교나 깡패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재학생과 신입생의 접촉을 차단하거나 감시했고, 학교가 내놓고 신입생들을 우대했기에 재학생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주눅이 들었다. 명문고 체제에 익숙해 있던 일부 인사들은 평준화를 “양과 이리를 한 학급에 몰아넣고 공부를 한다는 것과 같다”는 극한적인 언사로 공격하기도 했다.

 

평준화는 5대 도시로 확대되었지만, 중3 학생들의 연합고사 성적이 1974년 평균 171점에서 1975년 154점, 1976년 150점으로 곤두박질치자 하향평준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학력 저하는 평준화 이후 고등학교 교육 기회가 확대되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과거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점은 완벽히 무시되었다. 이화여고에서는 1975년 2학기에 “학업성적이 크게 뒤떨어져 정상적인 고교 교과과정을 이수할 수 없는 학습지진 학생” 24명에게 자퇴를 강요하여 22명을 자퇴시켰다. 많은 학교에선 당국에서는 펄쩍 뛰며 금지시켰지만 내놓고 우열반을 운영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수준별 수업을 한다는 명목 아래 억울하게 ‘이리’로 몰린 열반 학생들의 상처는 너무도 컸다. 화장실에서 마주친 우반 아이들 중 못된 것들이 인간 취급 안 할 때면 죽이고 싶었고, 담임선생님마저 자신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을 때는 죽고 싶었다.

흔히 사립학교들이 사립학교의 개성과 자율성을 침해당해서 평준화를 강력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정이 꼭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의 서열화가 뚜렷했던 시절, 추첨에 의한 학생 배정은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학교들이 신흥명문으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경복고만 하더라도 손꼽히는 명문이었지만 당시 교감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평준화를 경기와 서울을 앞질러 갈 좋은 기회로 보고 “선생님들을 들볶고 열심히 앞장서서” 입시 준비를 하여 평준화 1기의 대학입시(77학번)에서 서울대에 경기와 서울보다 많은 학생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학교는 점점 입시준비기관으로 전락했고 전인교육이란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은 목표가 되었다. 전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이나 희망에 따라 대학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제는 성적이 되는 학생은 무조건 무슨 과든지 서울대에 원서를 쓰라는 닦달을 받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상징하듯 한국 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은 이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완화하고 사회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고교평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명문고 출신의 학벌사회가 고착화되려 할 때 이를 크게 한번 흔든 충격요법이었다. 중학교 무시험은 국민학생을, 고교평준화는 중학생을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이제 대학입시는 패자부활전 없는 단판 승부가 되었다. 대학입시가 평준화 이전보다 몇배 치열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향평준화란 한때 사교육 시장에서 날리던 강사였던 교육평론가 이범이 단언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교육 문제에 연관된 가장 심각한 사기극”이다. 교육을 자유롭고 비판적인 시민의 양성으로 보느냐,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보느냐 아니면 신분고착화의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준화를 바라보는 입장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과거의 명문 고등학교 체제에 향수를 느끼는 세력은 이미 과학고다 외국어고다 하면서 실질적으로 평준화를 잠식했고,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뻔뻔한 구호를 내걸고 자립형 사립고도 만들어냈다. 최근의 국제중 사태에서 보듯이 특권층이 자기들끼리의 인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안전하게 대학에 진학한다는 ‘특수목적’을 위한 학교는 중학교 수준에까지 침투했다. 2013년판 <한국법조인대관>에 따르면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법조인을 출신교별로 볼 때, 개교 30년밖에 안 된 대원외고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명문 경기고와 나란히 460명을 배출했다. 새로운 명문고의 등장은 확연해졌다. 껍데기만 남은 평준화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신분제의 등장을 막을 수 없다. 박정희가 살아 돌아와도 통탄할 일이다.
posted by 바로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