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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따지는 '한국병', 학벌없는 독일에 가니…

[프레시안] 기사입력 2013-03-26 오전 7:10:24

한국 사회에서 학벌문제가 심각한 한국병(病)이라는 사실은 1996년 출간된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서울대의 나라>(개마고원 펴냄)를 통해 본격적으로 환기됐다. 이후 다른 국가들의 교육제도를 다룬 서적들이 꾸준히 소개되고, '학벌없는 사회'라는 시민단체까지 설립되었다. 그간 필자도 학벌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과연 '학벌없는 사회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다수의 독자들처럼 한국사회 안에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학벌의식이 없는 이상한 나라 독일"과 "독일을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한국"이라는 강렬하게 대비되는 경험을 갖게 했다.

장면 1.

필자가 살고 있는 바이로이트(Bayreuth)는 독일 바이에른(Bayern) 주의 북부에 위치한 인구 약 7만 5000명의 소도시다. 이 도시는 세계적인 작곡가 중 하나인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매년 8월이면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발'이 개최되어 전 세계 관광객들이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연주회를 보고 들으러 방문한다.
독일에 막 도착했던 지난해 9월, 필자가 참여하는 프로젝트 덕분에 짧은 시간에 독일 친구들과 만날 계기가 많았고, 곧 서로의 학문궤적을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학문궤적을 물을 때 한국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면, 한국인의 뛰어난 두뇌는 삽시간에 각 동료들의 "학사 어디? → 석사 어디? → 박사 어디? → 심지어 박사 후 어디?"로 이어지는 '학벌 사다리'를 만들고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단 몇 초 만에 끝내버리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한국인의 사다리 통념으로부터 독일 친구들은 한창 벗어나 있었다. 한 친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친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학사를 취득하고, 박사 학위를 바이로이트 대학에서 받았고, 박사 후 과정도 바이로이트에서 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걸 한국식으로 의역하면, 서울대 학부를 마치고서, 박사는 지방 대학에서 받은 것이다. 그걸로 모자라 박사 후 과정도 같은 대학에서 하길 원하고 있다. 이 친구 왈, "바이로이트의 연구환경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곳이 좋단다. 물론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 서울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서, 박사는 지도교수를 보고서 지방대로 간 것이다. 여기서 두 나라의 차이점은 독일에서는 이러한 일이 흔한 일이고, 한국에서의 그 사람은 굉장히 진귀한 사례로 손꼽힌다. 한국에서 순수하게 지도교수나 혹은 연구환경을 따져서 지방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역(逆)은 많다. 교수나 연구환경보다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라는 이름 때문에 학부 편입을 하거나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들이다. 물론, 독일친구들은 이러한 한국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필자가 독일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장면 2.

독일로 유학 오는 한국인 중에는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알려진 도시인 베를린이나 본(Bonn)에 위치한 대학을 가고 싶어한다. 정작 독일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독일 대학 서열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구축되어, 한국인들만의 잣대로 순위를 매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독일대학서열이라는 지리적 심상은 순수한 심상,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견고히 결합되어 있다. 한 국내 명문대 교수는 자신의 제자에게 독일 유학을 제안하면서 학문적 내실을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소도시의 덜 알려진 대학보다 한국에 더 알려진 대도시의 대학으로 가는 것이 나중에 일자리를 잡을 때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권유하였다. 그 제자도 보다 알려진 도시의 대학을 가는 것을 학교의 내실보다 보다 더 내실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국내에서 자신의 학부가 명문대라는 사실을 호명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상의 "독일 명문 대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심리체계이다. 한국사회에서 만들어진 학벌사회와 그 구성원이 어떻게 자신들의 인식을 특정공간에 투영하는지를 확인한 장면이었다.

장면 3.

필자의 창피한 경험도 털어놓아야 할 거 같다. 지난해 12월, 바이로이트 대학과 파사우(Passau) 대학이 공동으로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한 소도시 파사우를 갔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해준 파사우 대학의 교수는 "바이로이트처럼 큰 도시에서 이렇게 작은 대학까지 친히 방문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로 우리를 반겼는데,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의 의도는 정말 순수하게 물리적 크기의 차이를 말한 것일 뿐, 질적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 농담이었다. 창피한 경험이지만, 그때까지도 한국인의 잠재의식이 유감없이 작동한 필자는 바이로이트 대학이 파사우 대학보다 물리적 크기가 컸던 사실에 으쓱했었다! 정작 독일인들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증거가 아래 사진이다.


▲ 독일 파사우 대학 안내판, 도나우 강줄기를 따라 학교가 위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진태

이 사진은 필자가 도나우 강줄기를 끼고서 배치된 홀쭉한 파사우 대학의 형태가 흥미로워서 찍었지만, 파사우를 다녀온 후 내 의식을 곰곰이 좇아가다 보니 "이렇게 작은 대학이 있었네"라는 생각의 조각을 발견하고서 당황했다. 얼마나 촌스러운가? 한국인의 학벌의식은 크기에 열광하는 남근주의에 기반한 소위 명문대의 휘황찬란한 학교 건물과 규모에 대한 매료와도 얽혀 있다. 한국에서 그러한 건물들은 그 학교가 명문임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활용되고, 그걸 짓기 위한 돈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충당된다는 악순환은 망각하고 말이다.

대학 평준화의 긍정적 효과와 오해

이 글을 쓴 목적은 독자들도 "이상한 나라 독일의 한국인 엘리스"를 경험하라는 것은 아니다. 독일이 "이상한 나라"가 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학 평준화 때문이다. 독일은 '68혁명'의 성과로 대학 평준화가 이루어졌고, 모든 고등학생들은 한국의 수학능력시험과 유사한 아비투어(Abitur)를 치르면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교육분야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개인의 특정 경험이 일반화의 오류를 낳을 수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에서 기존 대학평준화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대학 평준화를 피력한 이러한 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보다 확고해졌다.

홍찬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은 "'서울대의 나라들'은 꼼수다"는 제목의 <동아일보> 2012년 8월 1일 자 칼럼에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제안한 지방국립대 집중 육성과 국립대 공동학위제를 통해서 서울대 수준의 대학들을 만들자는 제안에 대하여 효율성의 논리와 노벨상 수상자 배출수를 근거로 비판하면서 대학 평준화가 안된 해외 대학들의 우수성과 대학 평준화로 인해 뒤처진 대학들을 언급했다. 그는 평준화가 실패한 나라로는 프랑스와 독일을 손꼽았다.

노벨상 배출자 수는 차치하더라도-이는 홍찬식 위원에게도 자충수다. 이러한 잣대를 한국 대학들에 적용하면, 지금 한국에 서울대를 포함해서 단 하나의 대학이라도 남아 있을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외국의 대학 하나를 통째로 유치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보다 더 효율적이다.- 효율성의 논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그 효율성이 설사 시장주의적으로 교육을 접근하는 SCI급 논문편수를 따르더라도 그의 판단과 달리 필자가 목격한 독일 대학의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의 연구능력을 봤을 때 그들의 연구역량을 싸잡아 폄하하는 것은 과도하다. 결정적으로 홍찬식 위원이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의 서울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왜냐면 서울대는 모든 전공에서 다른 대학보다 최고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대 인력이 탁월한 연구성과를 내놓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모든 분야를 서울대가 최고여야만 하는 게 반드시 효율적인 것인가?

▲ 2004년 11월 30일 자 <조선일보> 기사 "평준화됐다더니…독일대학 '등급' 있었네"에서 인용한 도표. ⓒ조선일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쓴 2004년 11월 30일 자 기사에서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보도기사를 인용하면서 독일 내 학과별 1위 대학들을 소개했다. 여기서 이 기사를 언급하는 것은 앞서 제기한 질문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지점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의 의도는 대학 평준화를 시행하는 독일에서 최근에 순위조사를 했다는 사실과 여기서 소위 독일의 명문대로 알려진 대학들이 하향권으로 추락했음을 강조하면서 대학 평준화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역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자의 의도와는 달리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대학 평준화 시행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첫째, 끊임없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명문대라고 하더라도 도태될 수 있다는 사실. 현재 학벌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서울대가 이 사다리를 걷어차고, 똑같은 출발선에서 다른 대학들과 경쟁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홍 위원이 강조하는 효율성의 논리를 구현하는 것이다. 둘째, 다른 대학들도 서울대보다 특정 분야에서 최고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서울대는 "서울대"이기 때문에 모든 전공에서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해왔었다. 실제 교수들의 학문업적과 실력이 학교 명성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에도 서울대 레테르 덕분에 그들은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이는 다시 재정지원 및 연구 프로젝트 유치 과정에서도 서울대를 비롯한 수도권 명문대와 비교하여 훌륭한 교수진이 있더라도 지방대의 경우 유치를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지방 소도시 대학과 다름없는 바이로이트 대학은 앞서 이한우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적어도 생물학에서는 "서울대" 수준이다. 또한 필자의 전공과 관련해서 바이로이트 아프리카 연구 국제대학원(BIGSAS)은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명성이 높다. 바이로이트 대학보다 더 작은 파사우 대학은 동남아시아 연구로 유명하다. 독자들은 한국의 한 작은 지방대가 아시아 연구로 유명하여,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몰려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러한 연구중심의 대학체제는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각 대학의 교수진들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렇게 대학이 연구중심으로 바뀌는 것은 학부생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생각하듯이 학교이름을 보고서 학교를 선택하지 않고, 또한 선택권을 남보다 더 확보하기 위한 사교육의 희생양이 될 필요도 없이 원하는 대학을 갈 수가 있다. 필자는 지난 겨울학기에 연구중심의 학풍이 학부생들의 학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했다. 가령, 필자와 함께 대학원 세미나를 참가했던 한 독일 학부 친구들은 아프리카 대학원에서 개설된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를 경험하고, 그 나라를 사례로 한국에 잘 쓰여진 석사논문에 견줄만한 학부졸업논문을 썼다. 그 결과, 그들은 한국의 지역연구전문가들 못지않은 전문지식을 겸비하게 되었다.

지역균형발전의 측면에서도 서울대를 비롯한 수도권에 밀집된 대학으로의 쏠림 현상을 해결하는 단초로서 대학 평준화를 계기로 각 지방대학들의 연구가 특성화된다면, 그 지역출신 학생들이 굳이 수도권을 가지 않더라도 그 지역에서 대학을 나와서 그 지역에서 취직을 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지역 혹은 다른 국가로부터 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함으로써 침체된 지역경제와 지역사회에 사람이 순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물론, 독일을 하나의 정답으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대학정책과 관련해서는 독일이 한국보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이고 또한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가기 위해서 초등학교 시기부터 시작된 과도한 경쟁에 뛰어든 아이들과 이들을 고등학교까지 각종 사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등골이 휘는 부모들의 분투의 결과, 그 아이들의 인성은 친구를 앞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의 동반자기보다는, 경쟁자로 간주하며, 설사 명문대를 가더라도 사회부적응 등을 이유로 매년 자살 사고가 발생하는 비극적 결말이 일상화되었다. 현재의 학벌사회를 지탱하는 이러한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비효율성"의 항목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한국사회의 공교육과 사교육을 몸으로 체득했던 10여 년의 학창시절을 돌이켜볼 때 나는 솔직히 독일의 교육 시스템을 누리는 독일학생들로부터 부러움을 느꼈다. 이곳의 학생들은 한국에서처럼 친구보다 학벌 사다리의 위에 올라가서 느끼는 알량한 자만심보다는 스스로의 필요로 공부하고, 동료와 대화하고, 교류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가꿀 줄 아는 자존감을 갖고 있다. 그야말로, 학생이 학생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한국 사회야말로 독일인들의 눈에는 이상한 나라 그 자체다.

지금까지 서울대를 비롯한 소위 명문대 졸업장을 갖고 있는 평범한 졸업생부터 관료, 학계, 기업 등 한국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엘리트들까지 그들만의 부드러운 혹은 단단한 학벌네트워크에 기반한 경제적,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얻게 되는 편익이 대학 평준화 이후보다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현재로서 대학 평준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서울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하는 상관관계가 보다 뚜렷해지고, 설사 서울대가 아니더라도 명문사립대에 입학시킬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가능한 계층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반칙을 허용한 현재의 게임의 법칙을 굳이 바꾸길 원치 않는다.

이처럼 사회적 총 혜택을 고려하지 않은 비효율적인 학벌사회는 실로 지배계층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불평등 사다리라는 음모론적 해석을 하더라도 전혀 허무맹랑한 소리로 안 들릴 지경에 이르렀다. 학벌의식이 없는 독일을 정상적이고,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로 생각할 수 있는 한국사회를 기다리는 것은 요원할까? 독일의 경험처럼 68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혁적 움직임만이 대학 평준화를 가능하게 할까? 대학 평준화. 참으로 까다로운 화두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이 화두를 붙잡고,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황진태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 지리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