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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죽음의 트라이앵글을 기억하시나요?

박근혜 대통령님,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기억하시나요?

박 대통령님. 좀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2005년이었습니다. 당시 정부가 대입제도 개선안으로 수능을 9등급제로 고치고, 절대평가이던 고교 시험을 상대평가 9등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했지요. 그러자 고교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자신들은 학교 시험과 수능을 준비하면서 대학 논술도 대비해야 하는데, 학교 시험을 상대평가로 바꾸면 친구들 간 잔혹한 경쟁을 하라는 것이고, 그 셋을 준비해서 대학을 가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다며 “죽음의 트라이앵글(삼각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났습니다. 2005년 시절 고교생들은 그 때보다 훨씬 공포스러운 대입제도가 뒤따라올 것을 짐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대입제도에는, ‘수능 9등급, 내신 상대평가, 대학 논술고사’는 살아있고, 특기자 전형과 입학사정관제라고 하여, 고교 교육으로는 대비가 힘든 각종 대외 수상 실적 스펙 부담도 추가되었습니다. 특히 특기자 전형은 그 요구가 가공할 정도입니다. 즉, 수도권 주요 대학들은 고교생들에게 “과학/수학 올림피아드 수상 실적을 갖추라”, “우리 대학에 진학하려면 ‘서울대 영어교육과 박사과정 입학 자격 정도의 토플 IBT 점수와 텝스 점수(각 103점, 801점) 수준의 능력을 갖추고 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오라는 주장과 같은 격으로 교육기관으로서 선을 넘은 무리한 주장입니다. 뿐만 아니지요. 특기자 지원 기준으로 고교 시절 특정 외국어 과목 58 이수 단위를 요구하는 경우도 여럿 있는데, 이 요구에 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고 관점에서 보면, 이는 노골적으로 특목고 학생들을 우대하겠다는 조치입니다.

또한 수능 수학 범위는 늘어나 수학을 포기하는 ‘수포자’는 팽창했고, 대기업 SSAT 인적성 검사 같은 전형이 추가되었으며, 논술고사는 교사도 풀기 힘든 수준으로 어려워졌습니다. 여기에, 수능에 집착하지 말고 다양한 학생을 뽑으라는 수시 전형에서 수능은 ‘수능 최저등급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근 4~5년간의 대입제도를 죽음의 삼각형을 넘어, 죽음의 ‘5~6각형’, 죽음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릅니다. 교육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입제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세계 입시제도사에 이런 기형적인 제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정부는 지금까지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것을 기피했습니다. 도대체 대학입시가 무엇입니까? 대학 입시는 사람들의 ‘미래 욕망’이 대결하는 곳이고, 대입 정책은 이 미래 욕망을 ‘정의롭게’ 관리하는 틀입니다. 약자가 피해를 덜 받도록 정의롭게 관리하지 않으면, 욕망의 대결은 늘 강자의 완승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5년 전 국가는 자기 역할을 포기하고, 강자인 대학들에 국가 완장을 달아 주면서 욕망 관리 권한까지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작년에 대통령님이 공약으로 제시했던 “복잡한 대입제도 대폭 간소화”, “수시는 내신과 논술고사 중심, 정시는 수능 중심” 내용을 접하고, 기대 반 아쉬움 반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쉬움’은 서구 선진국에서 유례가 없는 대학별 고사를 유지하시겠다는 것 때문이요, ‘기대’는 그렇게 나마 대입제도가 간소화되면, 과도한 스펙을 요구하는 특기자 전형 등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8월 27일 교육부가 발표한 2017학년도 대입 간소화 시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공약과는 달리 실기 전형이라는 뜻밖의 옷을 입혀 특기자 전형을 유지시켰고 교과 스펙을 요구할 가능성을 허용했습니다. 학생들의 원성이 높고 서구 선진국에서는 채택하지 않는 대학별 고사(대학논술, 적성평가)는 존치하였고, 수시전형에서 수능 점수는 여전히 중시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해 당사자들 외에 온 국민이 해결을 여망하는 수능 수학 범위를 축소할 생각을 하지 않고 기존처럼 수능 수학 범위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최우선 방안으로 검토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실망이 컸습니다.

물론, 문제가 되는 대입 전형을 대학이 실시할 경우, 정부는 대학 자율로 이를 지양할 것을 권하며, 그래도 안 될 경우에는 해당 대학들에 재정 지원을 덜 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정부도 문제점은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무리 대학이 그릇된 일을 해도 국가는 법령으로 이를 막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재정 불이익을 감수하고 대학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를 경우엔 정부도 어쩔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정부는 대학의 자율을 지나치게 존중합니다만, 국민 다수의 이익과 국가의 공익을 해치는 대학 자율까지 존중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다른 교육 정책에서는 ‘금지’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쓰는 정부가 왜 나쁜 대입 정책에 대해서는 유독 ‘금지’라는 표현을 금칙어(禁飭語)처럼 기피하는지, 국민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방치하면 2017년 대입 제도 간소화는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 정부가 사태 해결에 머뭇거리면 결국 국민들은 각자 피해 보지 않을 길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대입 특기자 전형 스펙을 갖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특목고→국제중→‘한해 600~800시간씩 일반 과목까지 영어로 수업하는 사립초’→‘하루 6시간 이상씩 영어를 가르치는 유아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으로 내려가는 경쟁에 더욱 돌입할 것이고, 수학/과학 스펙 문제에서도 마찬가지 대응이 발생할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상실감과 불안감에 더욱 극단적인 사교육 대체재(代替財)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불 지르고 자기가 지른 불을 끄는” 효과 제로의 공허한 선택을 정부가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일이지요.

대통령님. 2017학년도 대입제도 최종안 발표가 임박했습니다. 최종안 속에, △특기자 전형 폐지 또는 교과 영역의 일체 스펙 요구 금지, △수학 수능 범위 축소, △수시 전형 속 수능 최저등급 요구 금지, △대학별 고사(논술 및 적성고사 등) 폐지를 포함해 주십시오. 이것은 무리한 주장이 아니라 대입시 개선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물론 이 제안을 정부가 수용해도 대학 입시의 모든 과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2017 대입제도를 개선한 후에도, 대입 경쟁 완화, 채용 시장의 학벌 차별 관행 해소, 수능 같은 국가고사 역할의 근본적 재검토, 5지 선다 객관식 학교 시험 체제의 쇄신 등 중요 과제들이 산적해있습니다. 아니, 지난 20년간 우리 교육을 주도했던 ‘1995년 5.31 교육개혁 체제’는 그 수명을 다했고, 지금은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미래 교육의 새 패러다임을 짜야 할 때입니다. 민간단체인 우리도 이 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상황이니, 역사적 사명에 관심이 있는 정부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핵심 과제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님. 여기서 이번 것을 먼저 해결해야 변화를 위한 그 큰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8년 전에 학생들은 그래도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 외치며 거리로 나오기라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그런 힘과 여유마저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교육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입제도”를 이번에 청산해야합니다. 2017학년도 대입제도 개편 최종안 발표가 임박한 지금, 박 대통령님의 현명한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2013. 10. 17.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송인수 윤지희


우리의 제안


1.과도하게 어렵고 양이 많아 학생들을 수학 포기자로 만드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수능 수학의 범위를 대폭 축소해야 합니다.
2.특기자 전형 등에서 교과 스펙 요구를 금지하고, 특정 고교에게 유리한 전형자격을 요구하는 행위를 막아야 합니다.
3.서구 선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학별 고사(대학 논술고사, 구술 시험, 적성평가 등)을 폐지해야 합니다.
4.수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다양한 학생들을 선발한다는 수시 전형의 취지에 맞게, 수시 전형에서 수능 최저학력기준 반영을 금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