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 이 글은 (사)김상진기념사업회가 발행하고 있는 계간지 『선구자』 118호에 실린 필자의 글(2019.10.10,)을 전재(全載)한 것입니다.>
바로코리아(오정삼)
필자가 현재 일하고 있는 (사)삼양주민연대가 20주년을 맞이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시 삼양주민연대의 20주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함께 한국사회가 맞이한 심각한 위기는 대량실업과 빈곤의 심화문제였고 이로 인한 사회적 충격은 어머어마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기업들은 연쇄부도사태를 맞이하고 봉급생활자들은 직장을 떠나서 거리를 떠도는 실업자로 전락하기 시작했으며 서울역 등의 역 인근에는 노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환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1999년 국회에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고, 2000년 10월 1일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발맞추어 1998년 11월, 노원-강북-성북 지역에서는 도시빈민지역의 저소득 주민들이 실업을 극복하고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서울북부실업자사업단’이 결성되고 1999년 1월에는 강북구에도 ‘북부실업자사업단강북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삼양주민연대의 전신인 셈이다. 북부실업자사업단강북지부는 설립 이후 줄곧 저소득주민들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생활상의 문제를 지역의 필요와 문제들에 연계하여 전개해왔고, 현재는 주거복지, 사회적 경제, 도시재생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동의 정신에 기반한 연대와 공동체 지원활동들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삼양주민연대의 20주년은 강북구 지역에서 뜻깊은 행사였고, 이 행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20~30대 청년들이 참여했다. 20주년사업을 주관해야 하는 나의 입장에서 이들 청년들에게 더욱 반갑고 고마웠던 것은 이들이 20주년사업을 마치 내일처럼 앞장서서 전개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자발적인 창의력을 보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역할을 높이고, 있는 그대로의 생각들을 존중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해.”가 아니라 “그렇군요.”라는 긍정적 수용과 공감은 이들의 열정을 높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사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의 변두리에서는 일하는 청년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베드타운으로 전락한 도시의 변두리는 여전히 한집 건너 미용실과 핸드폰 가게, 그리고 교회만 즐비한 기형적인 경제 순환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역경제의 토대 하에서 청년들이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일자리를 지역경제에서 찾아나가기는 쉽지 않고 결국 지역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공동체의 협력과 연대 사업에서 의욕이 넘치는 젊은 청년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우리는 지역경제가 선순환(善循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지역과 청년이 함께 협동하여 구축해나가는 캠퍼스타운 사업 등도 전개하며 청년들의 창업활동을 돕는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청년들이 지역에 삶의 기반을 두고 정착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더욱이 그나마 어렵사리 지역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청년들조차도 소위 어른(?)들과 함께 얼마간 일을 하다보면 애초의 초롱초롱하고 활기찬 얼굴들이 어두운 낯빛으로 변해버리고 어느새 떠나버리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이미 ‘경험이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꼰대化된 세대들이 사회환경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 때는 안그랬는데.” 식의 언어 폭력을 가하기 시작할 때 20~30대의 청년들의 마음 속에는 권력자들이 열정 많은 값싼 노동력을 자신의 장력 안에 넣으려는 의도 밖에 보이지 않게 되버리고 만다. 왜 우리는 ‘충고는 제일 잘 된 것이 자신이 간 데까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청년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뭉개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이미 고정관념으로 화석화돼버린 자신의 경험이 “먼저 알고 있는 것은 다 오류다”라는 명제를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따금씩 하는 역설 중에 40대-不惑은 혹하지 않고, 50대-知天命은 하늘의 뜻을 알고 있으니 남의 말을 절대 듣지않으려 한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그런데 이는 심리학적으로도 나이가 들수록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보다는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이 증가하기 때문에 추론이나 패턴지각, 개념형성 능력은 떨어지고 추상, 장기기억, 회상, 재인(再認) 능력만 발달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40대가 넘으면 진짜 남의 말 안듣고 꼰대짓만 할 수밖에 없다.”
이정도 나의 얘기가 전개되면 이미 마음이 불편한 독자들이 생겼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앞서도 말했듯이 어두운 낯빛으로 변해버린 청년들을 누가 만들고 있는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현정부의 절대절명의 과제로 떠오른 사법개혁을 위한 조국 법무부장관의 임명과정에서 드러난 20~30대의 기성세대들에 대한 실망감은 아무리 우리가 이를 외면하고자 해도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조국 장관이 비록 불법은 없었고, 더욱이 기회도 평등하기에 그가 사법개혁의 적임자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젊은 청년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감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을 세우겠다는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진정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조건의 평등’까지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편적 복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젊은 청년들의 눈에 조국 장관의 자녀문제는 기회는 평등했으나 조건까지 평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전 직원에게 선물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90년대 생이 온다』라는 책을 청년들과 함께 읽었다. 밀레니얼 세대인 20대 청년들이 소위 ‘공무원세대’라고 불리는 것에는 어찌 보면 그들의 눈앞에 남아있는, 출신과 배경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공정한 경쟁의 場은 공무원 시험밖에 안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청년들과 함께 오연호 기자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갖고 강연을 들었다. 행복지수 1위라는 덴마크의 시민들이 하나같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 사회가 자유, 평등, 안정, 신뢰, 이웃, 환경을 추구할 수 있는 문화를 깊게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드는 의문은 이러하다.
우리가 살아온 20대의 열정과 신념이 옳다고 확신한다면 현재의 20대 청년들이 또한 옳다고 인정해줄 수 없을까? 그들의 밝은 얼굴이 지역과 사회를 더욱 환하게 비출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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