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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보금자리를 튼다는 것

<주 : 이 글은 (사)김상진기념사업회가 발행하고 있는 계간지 『선구자 122호에 실린 필자의 글(2020.10.10,)을 전재(全載)한 것입니다.>

바로코리아(오정삼)

 

 

1.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
2. 지내기에 매우 포근하고 아늑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보금자리’에 대한 정의이다.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66년 9월 15일, 뉴질랜드 출신의 Robert John Brennan이라는 이름의 막 신부 서품을 받은 20대 청년이 천주교 골롬반외방선교회의 해외선교 임무를 띠고 이 땅을 밟았다. 전도유망한 맏아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낯선 한국 땅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한국사람들은 쥐고기를 먹는다고 한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셨다. 그가 입국할 때 한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은 김포공항이었고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제1한강교를 건너야만 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후 전차 종점 인근에 숙소를 정했는데 당시의 전차 요금은 2원이었다. 마침 근처 동숭동에는 서울대학교의 옛 캠퍼스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는 대학생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에게 한국 이름을 갖기를 권했고, 그의 전임자인 골롬반 신부, 패트릭 브레넌(Patrick Brennan)의 안(安)씨 성에 광훈(光訓)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는 안광훈(安光訓)이라는 한국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바로 ‘가난한 이웃들의 든든한 벗’으로 지난 54년간 한국땅에서 빈민들과 삶을 함께 해온 올해 80세의 안광훈 신부이다. 그리고 안광훈 신부가 지난 9월 24일 법무부로부터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한국국적을 수여받았다. 그에게 이제 한국은 법적으로도 조국이 된 것이다.

 

한국에 입국 후 그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초대교구장인 고(故) 지학순 주교가 맡고 있는 정선의 주임신부로 파견되어 10년간 일했다. 정선은 당시 전국에서 가장 고립되고 가난한 군 중의 하나였다. 포장도로는 전혀 없었고, 길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뿐이었다. 주민들의 삶은 척박했고 늘 높은 이자의 빚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그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고, 현재 정선신협의 총자산은 700억원이 넘게 되었다. 안광훈 신부와 가난한 사람들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와 지학순 주교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지학순 주교는 1974년 7월 6일, 당시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동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민청학련에 자금을 대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지자들에게 양심선언문을 전달하며 유신헌법이 무효임을 알렸고,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가톨릭교회는 그에 대한 대대적 구명운동을 벌여 1975년 석방될 수 있었다. 한편 이에 앞서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조종세력으로 소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발표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던 이철, 유인태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되었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도예종, 서도원, 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고, 다음날 4월 9일, 판결 18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사진1. 가운데가 구치소에서 출감한 고(故) 지학순 주교이고, 왼쪽에서 4번째가 안광훈 신부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장발 단속이 심했지만, 골롬반회 신부들은 지학순 주교를 석방할 때까지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기로 결의하였고, 정권은 외국인 신부들까지 장발 단속을 하지는 못했다.


안광훈 신부에게도 인혁당 사건은 여전히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그는 현재 작성 중인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비록 그 여덟 사람 중 한 사람도 몰랐지만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나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양쪽에서 목에 매달린 8명의 무고한 죄수들을 보지 않고는 십자가를 쳐다볼 수가 없다.

 

이후 그는 1981년부터 목동의 주임신부로 파견되었다. 당시 목동은 서울시 경계선과 김포국제공항 사이의 서울시 남서쪽 모퉁이 옆에 있는, 경기도에서 방치되고 버려진 안양천변 지역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시 재건축 사업의 일환으로 도심의 광활한 지역을 재개발 지구로 지정하고, 종종 대상 지역의 거주자들을 한밤중에 쓰레기 트럭에 태워서 도시 경계 밖에 내다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들 서울시 경계 바깥으로 쫒겨난 철거민들은 안양천을 따라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주지역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관광객들이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안양천변의 판자촌을 없애고자 목동지역 신도시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1992년, 안광훈 신부는 목동지역에서의 재개발과 철거투쟁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권유로 서울 북부의 대표적인 산동네인 삼양동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삼양동은 도봉구 미아 1, 6, 7동과 언덕 너머의 성북구 정릉4동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가 삼양동으로 이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삼양동 지역에 대한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었고, 대규모 재개발에 따른 파괴된 원주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 주민들과 함께 하며 투쟁하며 주민조직들을 결성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 마을 달성을 위하여 현재까지 노력하고 있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선교자의 사명이 거짓과 부정, 미움과 분열, 특권과 엘리트주의, 차별과 무관심, 욕심과 자만에 대하여 싸우면서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 일치와 평등, 동정심과 관심, 나눔과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그의 나이가 한국 나이로 80세가 되었다. 그리고 8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이 땅이 그를 자국민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적수여가 있던 날, 소감을 발표하면서 그는 ‘대한민국인, 안광훈!’으로 소감을 맺음했다.
이제야 비로소 대한민국은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인 보금자리가 되어 한 살배기 안광훈을 품은 것이다.